[책 리뷰] '싸다'와 '넣다'로 풀어낸 동서양 문명의 차이, 이어령의 《보자기 인문학》
최진석 교수님께서 인문학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고 정의하셨듯, 인문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물과 행위 속에 담긴 삶의 결을 읽어내는 작업입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 故 이어령 선생님의 《보자기 인문학》입니다. 보자기는 책이나 선물을 싸는 네모꼴의 흔한 천에 불과해 보이지만, 이어령 선생님은 이 작은 보자기 하나를 통해 동서양 문명과 한국 문화의 본질을 놀라울 정도로 명쾌하게 풀어냅니다.
1. 한국·일본·서양 문화를 가르는 보자기의 세계
보자기는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 있어 작은 소품부터 이불처럼 큰 물건까지 유연하게 감쌀 수 있는 신축성을 가집니다. 저자는 이 보자기라는 키워드로 한·일·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대조합니다.
- 한국의 조각보: 서민의 생활용품이자 고유의 예술작품으로,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국만의 고유한 문화입니다.
- 일본의 문양과 브랜딩: 일본에는 조각보나 자유로운 신축성은 없지만, 보자기의 문양을 상점의 상표로 사용하는 ‘브랜드’ 개념이나 목욕탕에서 사물을 싸는 용도 등 고유의 정교함이 발전했습니다.
- 서양의 가방 문화: 한국이 책을 보자기에 ‘싸서’ 다녔다면, 서양은 트렁크나 가방에 ‘넣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2. '싸다'와 '넣다' – 부드러움과 딱딱함의 문명사
이어령 선생님은 ‘싸다’와 ‘넣다’의 행위적 차이가 동서양 문명의 결정적 갈래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 넣다 (서양): 가방, 트렁크, 박스 등 물건을 넣는 도구는 나무에서 쇠로, 점차 딱딱한 재질로 발전합니다. 딱딱한 틀 속에 대상을 맞추는 방식입니다.
- 싸다 (한국): '싸기' 위해서는 도구가 비단이나 모태처럼 부드러워야 합니다. 이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뱃속에서 태아가 감싸져 있는 생명의 근원적 모습을 상징합니다.
| 구분 | 서양 문명 (넣다) | 한국 문명 (싸다) |
| 육아 문화 | 딱딱한 틀에 아이를 넣는 요람 | 아이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포대기 |
| 식기 문화 | 찌르고 잘라내는 날카로운 포크와 나이프 | 천지인(天地人)의 삼재 정신을 담은 젓가락 |
| 의복 문화 | 몸을 치수에 딱 맞게 가두는 양복(즈봉) | 여유를 두고 부드럽게 감싸는 한복 |
특히 전통 한복 바지는 보통 허리둘레보다 20cm 정도 여유 있게 재단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고정된 기준에 맞출 수 없다는 한국 고유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의복조차 몸을 틀에 '넣으려' 하지 않고 부드럽게 '싸려는' 정서의 반영입니다.
3. 넉넉함과 여유, 한국 문화의 본질
보자기의 부드러움과 넉넉함은 벼농사 문화권의 순환적 리듬과 연결됩니다. 저자는 이를 ‘까치밥 문화’와 ‘배고픔에서 나오는 여유’로 설명합니다.
- 까치밥의 미학: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감나무 꼭대기에 감 몇 개를 남겨두어 다른 생물과 나누어 먹던 선조들의 따뜻한 여유입니다.
- 비워둠의 절제: 한 숟가락 정도 배를 비워둠으로써 절제하고 여유를 만드는 행위는,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하려는 의지적 단련이었습니다. 배가 불러서 남기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 속에서 오히려 나누는 여유를 창출해 낸 것이 한국 정서의 핵심입니다.
앞뒤 어느 쪽으로 입어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한복 바지처럼, 한국의 미(美)는 고정된 틀에 매이지 않는 포용성과 여유로움에 있습니다.
4. 저자 이어령 선생님에 대하여
책을 읽다 보면 일본 문화와 지형, 사상을 너무나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어 "혹시 일본인이 아닐까?"라는 궁금증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故 이어령 선생님(1934~2022)은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신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자 문학평론가이십니다.
-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 한국과 일본의 문화를 날카롭게 비교 분석한 대표작으로,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조차 "일본인보다 일본을 더 정교하게 분석했다"며 감탄했던 명저입니다.
- 대표적인 지일파(知日派) 학자: 타자(일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역으로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밝혀낸 거목이셨습니다.
💡 총평 및 마무리
일상의 일회성 소모품처럼 여겼던 보자기를 통해 동서양의 철학, 육아, 의복, 식문화까지 통찰해 내는 거장의 시선에 깊은 감탄을 하게 되는 책입니다.
'딱딱하게 틀에 넣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대상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여백을 남겨두는 보자기의 넉넉함과 까치밥의 여유가 왜 필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세상과 타인을 대하는 시선을 한 층 넓히고 싶은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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